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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ALB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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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
BC이전 역사 개요
알바니아인들은 고대 인도유럽계 민족인 일리리아인의 후손들로 적어도 BC 1000년부터 발칸 반도 서부 지역에서 계속 살아왔다. 알바니아 남부에 있던 부족들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두러스 시와 레저 시는 그리스 식민지에서 비롯된 곳들이다. 북부의 일리리아인들은 지역 군주들에 의해 여러번 통일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군주는 북쪽의 달마치야에서 남쪽의 비요서 강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슈코더르를 수도로 삼았던 아르곤 왕(BC 3세기 후반)이다. 아르곤 왕이 죽은 뒤 왕비 테우타가 정벌사업을 벌였는데, 이것이 로마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여 BC 168년에 일리리아 전체가 로마에 점령당했다. 그후 알바니아는 로마 속주인 일리리쿰의 일부가 되었다.
BC 4세기 초에는 Raulanti, Ardiaei등의 고대국가를 이룩하기도 하였다. BC 2세기부터는 로마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여 4세기말에는 동로마제국에 편입되어 비잔틴문화에 예속되었으며, 로마의 통치하에 일리리쿰은 번영을 누렸다. 395년 부터는 행정적으로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합병되었다. 3∼5세기에 서(西)고트족과 훈족의 침략을 받고 6∼7세기에 슬라브족의 침략을 받았지만 알바니아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관습을 지켜낸 발칸 반도의 몇 안되는 민족 중 하나였으며, 9세기에는 불가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AC 1년 - 1900년 까지의 역사
14세기에 들어와 투르크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투르크인들은 후에 민족의 영웅이 된 계르기 카스트리오티를 교육시켜 이슬람교도로 개종시키고 스칸더르베그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나, 그는 오히려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물리쳤다. 1443년에 그리스도교를 다시 받아들인 그는 알바니아에 대한 투르크족의 지배에 성공적으로 대항했으나, 그가 죽은 이후 투르크의 지배가 강화되어 알바니아의 경제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78년 러시아와 터어키 사이의 전쟁이 발발하자 민족지도자 압둘 프라셰리(Abdul Frasheri)를 중심으로 프리즈렌(Prizren)연맹을 결성하여 터어키에 대항하였으나 1881년에 터어키에 의해 해체되었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
알바니아는 1912년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외침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며, 1944년에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이후 고립정책을 고수하여 오늘날 유럽에서 가장 후진국이 되었다. 그러나 뒤늦게 개혁의 물결을 타고 후진성과 고립주의를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있다.유럽의 기타 국가들이 이미 19세기 초에 시작한 민족주의가 알바니아에서도 대두되어 19세기 중엽부터 민족문화 부흥기에 접어들어 알바니아어 교육과 서적, 신문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 후 1915년에 열린 런던 비밀조약에 의해 북부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남부는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분할 통치하게 되었다. 알바니아는 이같은 결정에 반발하여 1918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1920년에는 티라나를 알바니아의 수도로 선언하여 이탈리아로부터 독립했다. 1920년 12월에는 독립주권 국가로서 국제연맹에 가입하였다. 1925년에 알바니아 공화국을 선언하고, 유고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1928년 왕으로 즉위한 보수주의자 조구(Ahmed Zogu)는 대내적으로는 독재체재를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이태리의 원조를 받으면서 독립국으로서의 기반을 굳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1939년 4월 무솔리니의 침공으로 이태리에 합병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동안 외부의 군사적 지원을 받지 않고 다만 유고의 전략적 지도만으로 공산화에 성공하는데, 1941년 엔버 호자(Enver Hoxha)는 자신을 주축으로 하여 3개파로 나뉘어진 공산주의파를 통합하고 당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된다. 1943년에는 독일군이 침공하였고, 1944년 5월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였으며, 1944년 11월 민족해방전선의 주도하에 공산정권을 형성하였다. 공산정권은 1946년 1월 11일 단일 후보를 내세운 선거를 치러 알바니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그해 3월 신헌법을 채택하였다. 1946년 7월, 11월에는 유고와 상호협력조약과 경제협약을 맺어 합자회사 설립, 관세폐지와 양국의 화폐 동일화 등을 체결함으로써 유고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1946년 코민포름에서 유고가 추방되자 유고와의 협약을 파기하였으며, 1948년 1월 당명을 알바니아 노동당으로 개칭하고 유고로 부터의 원조 단절과 농업집단화에 따른 경제적 난관을 타결하기 위해 소련과 기타 동구권 나라에 의존하기로 결정하고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호자(Enver Hoxha)는 스탈린의 지원을 받게 되며 1950년 9월에는 코메론에 가입하게 된다.1953년 스탈린이 서거한 후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격하하고 동서진영간의 평화공존을 추구하자 소련과의 유대도 불투명해졌다. 1955년 5월 바르샤바조약기구에 가입하고 그해 12월 14일에는 유엔에 가입하였지만 흐르시쵸프의 반스탈린정책은 호자(Enver Hoxha)가 구축한 스탈린적 체제의 동요와 분열을 유발하였기 때문에,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갔다.
그리고 서방과의 협력 증진을 위해서 6월 19일에는 CSCE(全歐安保協力會議)에 가입하였다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가 자유화하자 흐루시쵸프는 집단지도체제 확립 및 조제의 복권 등을 알바니아에 제시하였지만, 오히려 호자(Enver Hoxha)는 이를 거절하고, 스탈린을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로 추앙하면서 알바니아를 스탈린주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하여, 1961년 12월 소련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1962년에는 코메콘에서 탈퇴한다. 1961년 이후 소련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나서 중국의 모택동 공산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호자(Enver Hoxha)는 1967년 알바니아를 근대화하기 위해 '소문화 혁명'을 추진하였고, 또한 종교활동을 금지하였다. 1969년 9월 바르샤바 조약기구에서 탈퇴하면서 중국과 방위조약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1970년 중국이 서방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실용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자 이를 비난하였고, 1977년에는 중국이 알바니아에 대한 모든 원조를 중단함으로써 중국과도 결별하였다. 1985년 4월 11일 호자(Enver Hoxha)가 사망하자, 라미즈 알리아(Ramiz Alia)가 신임 노동당 제 1서기로 선출되었으며, 그는 호자(Enver Hoxha)의 정책을 고수하면서도 점차적으로 서구세력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1987년에 그리스와 이태리와의 관계를 개선하였으며, 서독과 국교수립을 맺어 최초로 서방측에서 6백만불의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미온적인 개방화는 심각한 경제난, 비밀경찰의 국민 감시, 인권 탄압 등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할 수 없었으며, 그 결과 1989년 13월 슈코더르(Shkoder)시에서 최초의 반정부시위가 발생하였다. 이같은 국내의 상황과 소련의 개방정책, 루마니아의 공산정권에 대한 민중봉기 등과 같은 국외의 사태를 직시하여 '위로부터의 부분적이고 점진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후 1990년 1월 22일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복수후보제 도입 등의 부분적인 개혁안을 결정하였고, 1990년 5월에는 국민들의 해외여행 자유화와 종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하는 사항과 계획경제를 포기하고 기업경영의 자율권을 20%내에서 인정하는 사항이 민회의에서 통과되었으며, 11월 카르카니(Adil Carcani) 수상은 알바니아의 경제난을 타계하기 위해서 식량과 생필품의 수입, 국내기업들과 외국기업과의 합작사업 허용을 내용으로 하는 신경제정책을 발표하였다. 1990년 12월 12일 알바니아 최초의 야당인 민주당(DPA, Democratic Party of Albania)이 창당되었고, 12월 30일에는 대통령제를 도입하였다. 1991년 2월 20일 티라나(Tirana)에서 수천만 시민들이 호자(Enver Hoxha)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시위가 발생하였고, 2월 22일 알리아(Ramiz Alia)대통령은 나노(Fatos Nano)를 수상으로 하는 과도내각과 대통령 위원